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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_ http://deepr.kr/260/


'얼리 또라이'를 움직이는 힘, 회사 간판에 기대지 않겠다는 의지

대한민국에서 여성 개발자로 살아남기 (6) '스위처' 개발자 박미정 인터뷰

 조경숙2017년 10월 17일 

우리 사회에서는 흔히 직장을 통해 그 사람의 업무 실력을 가늠하곤 한다. 예컨대 구글이나 페이스북,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일한다고 하면 그 사람이 ‘좋은 개발자'처럼 보이는 일터 후광 효과다. 물론 이게 틀린 말이라는 건 아니다. 일터 후광 효과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 나가는 사람이 있다. 7년차 프리랜서 개발자 박미정 씨다.

박미정 씨는 여성 개발자다. Java, Scala, Node.js 등 서버 개발 언어를 폭넓게 다룬다. 마지막으로 몸담은 아이오 스튜디오에서 CTO(Chief Technology Officer, 최고기술책임자)를 역임했다. 손 안 대고 불 끄는 스마트 스위치, ‘스위처'와 ‘링커' 등을 개발했다. 특히 아이오 스튜디오에서는 하청 공장에 맡기지 않고 내부적으로 생산 라인을 운영하며 제품을 제작하는데, 이를 관리하기 위한 내부 공정 관리 시스템을 미정 씨가 리딩해 개발했다.

image여성 개발자 박미정 씨. 사진=조경숙/Deepr

대기업에서도 개발하기 까다로운 공정 관리 시스템을 직접 개발한 데에 이어, 미정 씨는 벌써 2년 연속 국내 대규모 IT 컨퍼런스의 스피커로 섰다. IT 컨퍼런스는 특히 ‘남초' 로 유명해 여성 스피커가 한 명도 없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유리 천장'을 뚫고 미정 씨는 작년 ‘나프콘(나는 프로그래머다 컨퍼런스)’에서, 올해에는 ‘파이콘(파이썬 코리아 컨퍼런스)’ 에서 스피커로 참여했다. ‘나프콘'에서는 함수형 프로그래밍에 대해, 올해 파이콘에서는 파이썬 머신러닝 입문에 대해 각각 발표했다.

까만 건 콘솔이요, 하얀 건 글씨로다

미정 씨는 처음엔 ‘컴퓨터공학'이 뭔지 몰랐다. 대학에 가야한다니 성적에 맞추어 원서를 넣었고, 입학금이 가장 싼 곳을 택해 간 것이 컴퓨터공학과였다. 컴퓨터에 관심도 없었고 수업 난이도도 높아 뭐가 뭔지 알기가 어렵다보니, 재미가 없었다. 기껏 해봐야 까만 콘솔창에 하얀 글씨가 왔다갔다 했을 뿐이고, 그마저도 잘 되지 않았다. 흥미가 떨어지니 수업 시간엔 잠만 잤고, 학사경고를 겨우 면하는 수준으로 성적을 받았다. ‘그렇게 잘거면 나가라'며 교수님이 수업 시간에 쫓아내기도 했다.

image요새는 나름 파스텔톤도 있다(..)

개발에 흥미를 느끼게 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자퇴를 마음 먹고나서부터였다. 딱 한 학기만 더 다녀보고 정 안 맞으면 자퇴하자고 마음 먹고나니, 오히려 한 학기 동안 더 컴퓨터공학을 탐구해보자는 열정이 생겨났다. 원체 자던 학생이 갑작스럽게 눈이 반짝거리고 강의실에 앉아있으니 교수님도 기특하게 여겼는지 ‘학부 연구생' 을 제안했다.

‘학부 연구생' 이란 기업의 R&D 과제를 받아 학부의 학생들이 공동 연구하는 것으로, 그때 미정 씨가 맡은 프로젝트들은 디스플레이 여러개를 배치하여 3D 그래픽처럼 보이게 한다거나, 닌텐도 Wii 처럼 모션을 인식하는 장비 등 프로그래밍과 제품이 실제로 연결되는 일이었다. 컴퓨터 안에서 의미 없는 기호로 존재하던 것들이 실제 일상 생활에 접목되어 제품으로 나타나니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서 그때부턴 정말 열심히 개발을 공부했다. 누구보다도 앞장 서서 팀장을 맡고, 밤새 과제를 하기도 하며 프로그래밍에 푹 빠져 대학 시절을 보냈다.

개발자의 목소리도 들어주기 원했을 뿐

첫 사회 생활을 시작했던 국영 연구기관과 대기업은 모두 남초 집단이었다. 위에서 하라면 하라는대로 까야 하는 군대 문화였다. 연구기관에서는 인턴, 대기업에서 정규직으로 입사했는데 두 곳에서 모두 별난 캐릭터로 낙인 찍혔다. 자신이 개발해야 하는 부분에 대해 의견을 개진하거나, 너무 적극적으로 ‘개발을 하려든다'는 이유에서였다. 회사가 바라는 건 대충 돌아가기만 하는 개발 정도면 족했고, 그보다는 고위 임원의 의전이나 회의 시간에 잠자코 있는 묵언 수행이었다.

“상무님 오신다고 풀 정장 입고 정문에서 기다린 적도 있어요. 한 시간 정도 서서 기다렸는데, 도착해서 문 열어드리고 인사한게 다였어요. 나는 개발자인데 왜 이런걸 해야 하나 싶었죠."

하루는 PM이 고객사와 회의를 하고 오더니, 시스템 오픈하기 일주일 전인데도 불구하고 시스템 설계를 완전히 바꾸어서 돌아왔다. 수정이야 밤샘해서라도 다시 개발하면 되지만 문제는 PM의 태도였다. 그들에게 개발자는 기계나 다름 없었다. 여기에 대해 어떤 논의도, 설명도 하지 않은 채 무작정 시스템을 다시 엎고 개발하라고 했고, 항의하자 ‘막내가 어디 감히'라며 눈을 부라렸다. 그때 생각했다. ‘아, 난 정말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결국 입사한지 2년만에 퇴사하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 과정에서 교수님의 제자를 통해 비트코인 관련 스타트업인 Korbit(한국 비트코인 거래소)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그곳은 정말 다른 문화였다. 서로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묻고 토론했고, 서로가 맡은 업무에 대해 적절한 권한과 책임이 부여되었다. 기획자가 늘 자신의 기획을 개발자에게 강요했던 기존 대기업과 달리, 여기에서는 기획자, 개발자, 디자이너 등 서로 다른 직군끼리도 협력을 이루어내기 위해 소통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일환으로, 데일리 스크럼 미팅 과 같은 실험들이 자주 이루어졌다. 소수의 목소리에 조직이 점유되지 않고 모두의 목소리로 평등하게 운영되는 것이 그 회사가 가진 가장 큰 매력이었다.

Korbit에서 배운 민주적인 엔지니어 문화를 근간으로 스스로 창업에 뛰어들기도 했지만 실패했고, 그 이후 쿠팡에 입사했지만 몇 개월 되지 않아 퇴사했다. 개발 문화에 대한 칭송이 자자해서 입사했는데, 생각보다 구성원 간의 의견이 민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니고 싶은 회사에 대한 기준은 확고했다. 무엇보다도 개발자의 목소리가 반영될 수 있는 회사 여야 했다.

새벽 4시 일어나 공부하는 '얼리 또라이'

얼리 또라이'는 미정 씨가 운영하는 페이스북 그룹이다. ‘일찍 일어나는 또라이’의 준말로, 그룹에 들어가면 이르면 오전 3시, 늦게는 오전 5시 사이에 게시물이 올라와있다. 그날 그날 스스로 정한 아침 미션을 수행하고 기록하는 그룹이다.

image박미정 씨가 페이스북 '얼리 또라이' 그룹에 게시한 글. 사진='얼리 또라이'화면 캡쳐

가장 먼저 일어난 사람이 그날의 미션 포스팅을 올리고 순차적으로 댓글을 다는 형태다. 각자 운동을 하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고, 개발 공부를 하기도 한다.

“10년 전부터 하루에 4~5시간만 잤어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포기하긴 싫어서. 다 하고 싶어서요.”

일도 일이지만, 공부를 놓으면 활력이 떨어진다며 일상적으로 공부를 지속했다. 작년까지는 밤에 개인 공부를 했었는데 함께 스터디하던 선배들과 ‘누가 일찍 일어나서 공부하나' 내기한 것을 계기로 새벽으로 바꾸었다. 작년까지 생활 패턴이 밤 열두시까지 코딩, 새벽 두세시까지 개인공부였다면 지금은 열두시까지 코딩, 새벽 네시에 기상하여 개인 공부를 시작하는 패턴이다. 우리 함께 도전해보자며 시작한 내기가 지금은 ‘얼리 또라이' 모임으로 발전했다.

아침마다 혼자 공부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스터디 모임도 지속한다. 이번 달부터는 새로운 개발 아키텍처를 위한 스터디를 시작할 예정이다.

자신의 자리를 꿈꾸는 힘

꿈꾸는 것은 ‘힘'이다. 어떤 자리에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고민하고 사유하는 건 그 자체로 나 자신의 에너지가 된다. 미정 씨는 정기적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어떤 회사에서 어떤 제품을 개발하고 싶은지 고민한다고 했다. 아마 그 꿈이 새벽부터 자정까지 그녀를 쉴 새 없이 움직이게 하는 동력일 것이다. 지금 그녀가 세운 기준은 다음과 같다.

  • 첫째,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선배들이 있을 것
  • 둘째, 노동에 대한 보상을 미래로 미루지 않을 것
  • 셋째, 내가 사용하고 싶은 제품을 개발할 것

대기업과 스타트업, 여러 조직을 거치며 그녀가 세운 기준이다. 미정 씨가 생각하는, 되고 싶은 개발자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마지막 질문에 미정 씨는 이렇게 답했다.

“좋은 개발자는 문제를 마주했을 때 회피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는 사람이죠. 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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